“저는 사소한 것에서도 성장한다고 느껴요.”
- 장유리 (2012 홍성 갓골생태농업연구소 청년지역활동가 / 현 마을학회 일소공도, 평민마을학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온 장유리 씨와 삼선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장유리 씨는 강원도 인제에서 나고 자랐다. 13년 전, 그가 농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넌 인문계에 가야지. 그래야 대우받는 직업을 가질 수 있어.” 어릴 적부터 농사짓는 사람들을 보고 자랐는데 갑자기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라니. 살았던 삶을 뚝 끊고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열여섯의 장유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농업고등학교 아니면 농업대학이라도 가겠다며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이하 풀무학교) 전공 과정을 알게 됐다. 농업대학에 가도 농사짓는 법은 못 배운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열아홉이 되던 해, 충청남도 홍성으로 홀로 떠났다.
풀무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 붙일 일이 별로 없었다. 수시로 홍동천에서 수질 조사를 하고, 논 생물을 채집하고, 황새 복원 지역을 돌아다녔다. 채집과 연구는 호기심 많은 그에게 딱 맞는 일이었지만, ‘제대로 1인분을 하고 있나’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이듬해 마을도서관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동네 지나다니며 만나는 할머니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월급을 받는데, 내가 지금 그만한 일을 하나 싶었다. 언제까지 곁눈질로 일을 배우며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면 달랑 가방 하나 들고 강원도 인제로 갔다. 언니 집이 있는 수원에도 갔다. 어디든 홍성과 떨어져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그의 현 좌표는 다시 홍성. 소속을 물으니 아주 긴 답이 나왔다. 젊은협업농장 소속이자 마을학회 사무국 간사, 시골문화사의 직원, 밀 작목반의 총무란다. 삼선재단 청년지역활동가 인턴십의 멘토이기도 하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여러 사정이 뒤섞이는 일이다”라고 적었던 2012년 장유리 씨의 인턴십 활동 평가서 문구가 떠올랐다.


밭에 사는 생물을 관찰하는 모습. 호기심이 많은 그에게 채집과 연구는 흥미로운 일이다.
농업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던 중학생
- 열여섯 살에 농사가 짓고 싶었어요?
“저희 집이 시골이었거든요. 자영업을 하더라도 텃밭은 당연하게 했어요. 저한테는 익숙한 삶이었는데 부모님은 농사를 진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모도, 큰아빠도, 앞집 할머니도 다 농사짓고, 우리도 할머니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았는데 그거를 뚝 끊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전 그러면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풀무학교 전공부는 어떻게 입학했어요?
“부모님이 신뢰하는 목사님이 소개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제가 어디라도 들어간다니까 안심하셨던 거 같아요. 보내고 나서야 19살짜리 막내딸을 갑자기 멀리 떨어진 낯선 곳,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보냈다는 걸 실감하신 거 같아요. 그때부터 엄마는 대학 졸업장은 나오는 거냐, 학점 인정은 받을 수 있냐 물었어요. 저는 그런 거 없다고 말했죠. 엄마는 그럼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더라고요. 졸업하고 나서도 이제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아빠랑 언니는 졸업식에 와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마을 분들이 다 같이 참여해서 그분들이 생각하는 저의 성장을 이야기했거든요. 그걸 보고 유리가 2년 동안 이런 곳에 있었구나라며 안심했던 거 같아요.”
- 지지를 받아도 불안할 시기였을 텐데 걱정되지 않았어요?
“고민은 많았죠. 그래도 막연히 길이 있겠지 생각했어요. 제가 풀무학교 전공부에 입학했을 때 졸업생 선배 중 몇몇이 홍성에 남았거든요. 취직 자리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홍성 출신도 아니고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닌데 “지역에 남겠다”고요. 그중 한 선배가 삼선재단 인턴십 지원을 받는 걸 보면서 막연히 나도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그 후 유리 씨도 2012년에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인턴십 지원을 받았네요. 지원금은 주로 어디에 썼어요?
“밥 먹고 술 먹고 군것질했던 거 같아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나 마음껏 고민도 하고요. ‘왜 나한테 돈을 주지? 혹시 내가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인턴십 발표회 때 만난 다른 지역 친구들은 계획이나 비전이 있어 보였거든요. (웃음) 그때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당시만 해도 저는 홍성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몰랐거든요.”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던 20대를 보내며
그가 홍성에 온 지 10년이다.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다 어느새 29살이 됐다. 2012년에는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서, 2014, 2015년에는 마을도서관에서, 2017년부터는 마을학회 일소공도에서 지금까지. 일 경험도 많이 쌓였다.
- 최근 3년간 마을학회 만드는 일을 같이했는데 어떤 경험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하며 신기했고 그 과정을 내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게 엄청 짜릿했어요. 저는 뭐 토론회 하면 녹음기를 놓는다든가 하는 정도의 역할이었고 큰 역할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이게 엄청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에 몇 년 살았다고 이런 경험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하고 신이 났죠.”
- 별 역할이 없다고 했지만, 어느새 유리 씨가 청년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홍성에 와서 선배들의 굉장한 사랑과 그들이 이미 소화해낸 경험을 전해 받았어요. 저도 그러면 좋을텐데 그러기에는 아직 제 것이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중간에 낀 사람으로서 남의 것을 전달하고 통역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는 만큼 지금 본인이 어떤 배경에 놓여있는지 말해주고, 절대적인 건 없으니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하라고 얘기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 유리 씨에게는 배움과 성장이 중요한 이슈인 거 같아요. 언제 자신이 성장한다고 느껴요?
“저는 되게 사소한 것에서도 성장했다고 느껴요. 특히 홍성에서 지내면서는 주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인정하고 ‘아, 내가 이번에는 좀 잘한 것 같아, 성장한 거 같아’ 이런 생각을 잘하게 됐어요. 그게 제겐 배움이었던 거 같아요.”
2, 3년에 한 번 홍성을 떠났던 그의 발을 묶는 관계가 최근 생겼다. 지금 사는 집에 딸린 500평의 농지에서 시작된 관계다. “집주인 분이 ‘빈 땅이 있으니 혹시 농사지으려면 지어라’라고 했는데, 그건 그냥 지으란 얘기에요.” 하지만 일하면서 혼자 넓은 땅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밀 작목반에 끼어서 총무 일만 맡았는데 의외로 적성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척척 돈을 입금하고, 엑셀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는 요즘 밀 작목반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다. “동네 출신 아닌 20대 여성이 작목반에 끼는 혁명”을 자신도 모르게 해낸 것이다. 덕분에 요즘 더 지역에 깊숙이 껴들어간 거 같단다. 총무 후임자를 찾지 않는 이상 이제 홍성을 떠날 수 없다는 그.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났던 20대를 지나 새로운 30대를 맞이하고 있다.

포플러 나무, 소리쟁이. 그가 관찰해서 그린 자연물 그림들
글 : 우민정
사진 : 이준표
“저는 사소한 것에서도 성장한다고 느껴요.”
- 장유리 (2012 홍성 갓골생태농업연구소 청년지역활동가 / 현 마을학회 일소공도, 평민마을학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온 장유리 씨와 삼선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장유리 씨는 강원도 인제에서 나고 자랐다. 13년 전, 그가 농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넌 인문계에 가야지. 그래야 대우받는 직업을 가질 수 있어.” 어릴 적부터 농사짓는 사람들을 보고 자랐는데 갑자기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라니. 살았던 삶을 뚝 끊고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열여섯의 장유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농업고등학교 아니면 농업대학이라도 가겠다며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이하 풀무학교) 전공 과정을 알게 됐다. 농업대학에 가도 농사짓는 법은 못 배운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열아홉이 되던 해, 충청남도 홍성으로 홀로 떠났다.
풀무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 붙일 일이 별로 없었다. 수시로 홍동천에서 수질 조사를 하고, 논 생물을 채집하고, 황새 복원 지역을 돌아다녔다. 채집과 연구는 호기심 많은 그에게 딱 맞는 일이었지만, ‘제대로 1인분을 하고 있나’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이듬해 마을도서관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동네 지나다니며 만나는 할머니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월급을 받는데, 내가 지금 그만한 일을 하나 싶었다. 언제까지 곁눈질로 일을 배우며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면 달랑 가방 하나 들고 강원도 인제로 갔다. 언니 집이 있는 수원에도 갔다. 어디든 홍성과 떨어져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그의 현 좌표는 다시 홍성. 소속을 물으니 아주 긴 답이 나왔다. 젊은협업농장 소속이자 마을학회 사무국 간사, 시골문화사의 직원, 밀 작목반의 총무란다. 삼선재단 청년지역활동가 인턴십의 멘토이기도 하다. “지역에 산다는 것은 여러 사정이 뒤섞이는 일이다”라고 적었던 2012년 장유리 씨의 인턴십 활동 평가서 문구가 떠올랐다.
밭에 사는 생물을 관찰하는 모습. 호기심이 많은 그에게 채집과 연구는 흥미로운 일이다.
농업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던 중학생
- 열여섯 살에 농사가 짓고 싶었어요?
“저희 집이 시골이었거든요. 자영업을 하더라도 텃밭은 당연하게 했어요. 저한테는 익숙한 삶이었는데 부모님은 농사를 진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모도, 큰아빠도, 앞집 할머니도 다 농사짓고, 우리도 할머니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았는데 그거를 뚝 끊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전 그러면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풀무학교 전공부는 어떻게 입학했어요?
“부모님이 신뢰하는 목사님이 소개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제가 어디라도 들어간다니까 안심하셨던 거 같아요. 보내고 나서야 19살짜리 막내딸을 갑자기 멀리 떨어진 낯선 곳,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보냈다는 걸 실감하신 거 같아요. 그때부터 엄마는 대학 졸업장은 나오는 거냐, 학점 인정은 받을 수 있냐 물었어요. 저는 그런 거 없다고 말했죠. 엄마는 그럼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더라고요. 졸업하고 나서도 이제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아빠랑 언니는 졸업식에 와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마을 분들이 다 같이 참여해서 그분들이 생각하는 저의 성장을 이야기했거든요. 그걸 보고 유리가 2년 동안 이런 곳에 있었구나라며 안심했던 거 같아요.”
- 지지를 받아도 불안할 시기였을 텐데 걱정되지 않았어요?
“고민은 많았죠. 그래도 막연히 길이 있겠지 생각했어요. 제가 풀무학교 전공부에 입학했을 때 졸업생 선배 중 몇몇이 홍성에 남았거든요. 취직 자리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홍성 출신도 아니고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닌데 “지역에 남겠다”고요. 그중 한 선배가 삼선재단 인턴십 지원을 받는 걸 보면서 막연히 나도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그 후 유리 씨도 2012년에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인턴십 지원을 받았네요. 지원금은 주로 어디에 썼어요?
“밥 먹고 술 먹고 군것질했던 거 같아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나 마음껏 고민도 하고요. ‘왜 나한테 돈을 주지? 혹시 내가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인턴십 발표회 때 만난 다른 지역 친구들은 계획이나 비전이 있어 보였거든요. (웃음) 그때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당시만 해도 저는 홍성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몰랐거든요.”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던 20대를 보내며
그가 홍성에 온 지 10년이다.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다 어느새 29살이 됐다. 2012년에는 갓골생태농업연구소에서, 2014, 2015년에는 마을도서관에서, 2017년부터는 마을학회 일소공도에서 지금까지. 일 경험도 많이 쌓였다.
- 최근 3년간 마을학회 만드는 일을 같이했는데 어떤 경험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하며 신기했고 그 과정을 내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게 엄청 짜릿했어요. 저는 뭐 토론회 하면 녹음기를 놓는다든가 하는 정도의 역할이었고 큰 역할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이게 엄청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에 몇 년 살았다고 이런 경험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하고 신이 났죠.”
- 별 역할이 없다고 했지만, 어느새 유리 씨가 청년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홍성에 와서 선배들의 굉장한 사랑과 그들이 이미 소화해낸 경험을 전해 받았어요. 저도 그러면 좋을텐데 그러기에는 아직 제 것이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중간에 낀 사람으로서 남의 것을 전달하고 통역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는 만큼 지금 본인이 어떤 배경에 놓여있는지 말해주고, 절대적인 건 없으니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하라고 얘기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 유리 씨에게는 배움과 성장이 중요한 이슈인 거 같아요. 언제 자신이 성장한다고 느껴요?
“저는 되게 사소한 것에서도 성장했다고 느껴요. 특히 홍성에서 지내면서는 주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인정하고 ‘아, 내가 이번에는 좀 잘한 것 같아, 성장한 거 같아’ 이런 생각을 잘하게 됐어요. 그게 제겐 배움이었던 거 같아요.”
2, 3년에 한 번 홍성을 떠났던 그의 발을 묶는 관계가 최근 생겼다. 지금 사는 집에 딸린 500평의 농지에서 시작된 관계다. “집주인 분이 ‘빈 땅이 있으니 혹시 농사지으려면 지어라’라고 했는데, 그건 그냥 지으란 얘기에요.” 하지만 일하면서 혼자 넓은 땅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밀 작목반에 끼어서 총무 일만 맡았는데 의외로 적성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척척 돈을 입금하고, 엑셀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는 요즘 밀 작목반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다. “동네 출신 아닌 20대 여성이 작목반에 끼는 혁명”을 자신도 모르게 해낸 것이다. 덕분에 요즘 더 지역에 깊숙이 껴들어간 거 같단다. 총무 후임자를 찾지 않는 이상 이제 홍성을 떠날 수 없다는 그.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났던 20대를 지나 새로운 30대를 맞이하고 있다.
포플러 나무, 소리쟁이. 그가 관찰해서 그린 자연물 그림들
글 : 우민정
사진 : 이준표